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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성을 훔쳐오는 두 가지 시선: 이신후 <훔친 개 훔친 아기 Stolen baby, Stolen dog (2022)> 리뷰

윤자영

 <훔친 개 훔친 아기 Stolen baby, Stolen dog>는 1부의 영상 상영, 그리고 앞의 영상과 연결 지어지는 2부의 퍼포먼스로 이루어진 프로젝트이다. 1부에서는 관객이 극장 안 객석에 앉아 스크린을 통해 영상을 관람하게 된다. 상영되는 영상은 <baby, dog, and Dog (2021)>시리즈로 서울 근교의 공원, 서울 중심부에 위치한 대형 할인 마트의 옥상, 주차장을 배경으로 촬영된 퍼포먼스 영상이다. 1부의 영상과 2부의 퍼포먼스 모두 ‘개와 아기, 짐꾼, 정원관리사’ 등으로 지칭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캐릭터들이 존재하는 방식과 작가가 이를 묘사해내는 방법은 영상과 실황 퍼포먼스에서 입체적인 차이를 가지게 된다. 캐릭터 외에도 영상과 퍼포먼스 사이의 공통 된 요소들을 둘러싸고 두 작업에서 다른 층의 해석과 구성이 만들어진다. 영상에서는 위의 요소들과 함께 분절된 캐릭터들간의 관계성이 건조한 리듬으로 편집됐다면, 퍼포먼스에서는 3층의 복도에서 지하로 향하는 관객의 관람 시선과 함께 얕은 기류 속에 매여 있던 고삐를 풀어 놓은 듯한 개와 아기의 적나라한 신체성이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1부 <baby, dog, and Dog (2021)> 영상 시리즈는 로맨틱한 음악과 정지된 퍼포먼스 스틸 이미지들이 리드미컬하게 재생되며 시작된다. 스틸 이미지들은 퍼포먼스 안에서 비에 젖은 신체의 일부들을 추상적인 형태로 포착해내기도 한다. 이러한 시작으로 출발되는 영상은 야생적인 무언가를 떠올릴 법한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아닌, 건조하지만 동시에 축축함을 지녀 불쾌감을 유발하는 듯한 독특한 인상을 만들어내며 진행된다. 이는 영상 속에서 빗물로 인해 찰팍해진 아스팔트 위 아기의 역할을 맡은 인물이 아기도 아닌, 죽은 것도 아닌, 성인도 아닌 상태로 아스팔트에 머리카락이 쓸리며 이동되어지던 감각과 유사하다. 그리고 개의 역할을 맡은 남성이 네발로 기어가며 입으로 손전등을 물고 있을 때, 손전등을 물기 위해 사용한 과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평범하지는 않은 입 근육의 불쾌한 강도와도 유사하다. 그리고 그 손전등으로 대낮의 나무를 비추었을 때 자연광에 섞여 미미하지만 기능을 하기는 하는 인공적인 빛의 정도와 유사한 감각들이 이어진다.

 

 직립 보행이 불가하고 사회화된 인간의 요소를 상실한 혹은 의도적으로 상실을 수행하는 개와 아기 역할의 인물들은 혼자 해낼 수 있는 행위가 거의 없다. 이들은 짐꾼이나 다른 역할의 인물에 의해 반응하거나 그들에 의해 이동하게 된다. 사회성이 사라진 얼굴은 무해해 보이면서도 기이하게 단단한 인상을 준다. 이들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이들을 지탱해 줄 수 있는 인간이나 이들의 야생성을 상대적으로 확인시켜 줄 사회가 있어야 존재가 증명되는 듯 보이기도 한다. 이들을 보면 아기의 손과 발에 묶여있던 미약한 실과 같은 보호라는 행위가 필연적으로 연상된다. 보호와 사회에 대한 단상은 고층 빌딩들 사이에 자리한 대형 할인 마트의 옥상과 주차장이라는 배경을 통해 관람자에게 구체적으로 연결된다. 대도시 상업 건물의 거친 바닥 위에서 반복되는 개와 아기의 유약한 행위와 이동들은 자연스럽게 배경과의 마찰, 이질감을 만들어 낸다. 이 이질감은 영상 속에서 이불보와 같은 역할을 하는 듯 보였던 투명한 필름과 그 위에 찝찝하게 맺혀있던 물기와 같은, 좀처럼 깨끗하게 정리될 수 없는 느낌을 통해 소용없는 보호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러한 불편함 사이에서 아기를 태우는 유모차와 같은 무언가를 돕기 위한 사물들은 소음을 내며 짐을 옮기는 둔탁한 도구가 되고 철창과 같은 박스는 개의 집과 같은 모양새가 된다.

 

 2부의 퍼포먼스는 전면의 스크린을 바라보던 극장 객석이 아닌 극장의 3층 복도로 관객을 안내한다. 3층의 복도를 객석으로 삼아 관객들은 중앙의 뚫려있는 무대를 바라보게 되고 퍼포먼스는 시작된다. 영상 속 개와 아기를 비롯한 캐릭터들이 실제 상황으로 튀어나올 것이라는 예측과 함께 관객들은 입장과 동시에 아기 역할의 인물이 천장에 매달려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1부에서 영상과 영상을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이 평행했다면 퍼포먼스에서 관객의 평행한 시선이 닿는 곳은 천장에 높이 매달린 아기의 불안함이다. 이 불안함으로부터 퍼포먼스는 시작되고 아기의 매달림이 바닥으로 내려옴과 동시에 위에서 아래의 지하 세계를 내려 보는듯한 관람의 전환이 생겨난다. 대형 마트와 잔디 같은 영상 속 실제 배경들은 블랙박스라는 특수한 공간 안에서 습지의 자갈들로 압축되며 상징성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검은 바닥 위 자갈에 의도적인 분무를 통해 적당한 습기를 만들어내며 영상에서 드러났던 축축한 불쾌감을 대신하는 음습함을 만든다. 이는 영상 속에서 습기를 머금었던 무언가를 보호하는 필름지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또한 영상 속에서 개와 아기를 움직이게 하던 외부 조건들은 바닥에 비춰지는 붉은 선으로 치환되며 퍼포먼스에서 행위와 동선의 기준이 된다. 영상 속 도시 배경, 투명필름, 외부의 영향과 같이 개와 아기의 수동성을 확인시켜주던 요소들은 블랙박스 안에서 검은 바닥과 붉은 선, 자갈과 습기, 자갈을 이동시키는 거친 쇠스랑에게 역할을 넘겨준다. 이 요소들은 더 이상 개와 아기를 보호하는 요소가 아닌, 소음에 가까운 소리와 함께 야생적 존재에게 힘을 가하는 요소가 된다.

 

  영상에서 건조하고 미약한 불쾌감을 가진 신체들이 주는 이탈된 감각이 야생성을 상상하게 했다면, 퍼포먼스에서의 야생성은 개와 아기에게 위의 요소들이 가해지는 순간 극한에 몰린 신체가 분출하는 에너지를 통해 포착된다. 블랙박스 안에서 수동적 존재를 움직이게 하는 역할로 영상 속 요소들이 의도적으로 선택되면서 <훔친 개 훔친 아기 Stolen baby, Stolen dog>에서의 ‘훔친’은 이질적이고 수동적인 신체의 에너지를 훔쳐내기 위한 알리바이처럼 보이기도 한다. 퍼포먼스 안에서 캐릭터들도 각자 부여된 수동 능동의 역할이 뚜렷해지고 증폭된다. 보다 동물적인 움직임과 소리, 에너지를 재현해내는 개는 ‘빨간 야생개’라는 새로운 캐릭터를 만나 자동 사료 급식기를 두고 과격한 다툼을 벌이게 된다. 이때 이들을 움직이게 만든 자동 사료 급식기는 카메라를 통해 개들의 시선을 역으로 노출시킨다. 개들의 눈높이에서 보이는 광경은 이들을 단순히 수동적 존재라고 넘길 수 없게끔 본능적인 생존의 긴장감을 유발시킨다. 개의 목줄을 끌고 다니며 동시에 아기를 촬영하고 이를 바닥에 놓인 모니터에 실시간으로 노출하는 ‘개주인’과 같이 개와 아기를 움직이게 하는 인물도 명확해진다. 이들을 움직이게 하는 정원관리사, 짐꾼 같은 역할들은 수동적 존재가 드러나기 위한 필수적인 인물이기도 하면서, 퍼포먼스 안에서 상황을 만들어 나가고 정리해 나가며 퍼포먼스라는 임의적인 사회의 규칙을 끌고 나가는 인물이 되기도 한다.

 

 이후 정원관리사와 기타 인물들은 쇠스랑과 밀대로 바닥에 흐트러진 아기에게 가하던 자갈과 개 사료를 정리한다. 밀대의 부드러움과 갈퀴의 차가운 소음이 동시에 들리며 이를 정리하는 모습은 수동적 존재를 움직이게 하던 기준과 규칙, 사회를 구성하는 틀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흐트러진 자갈과 이에 섞여 들어간 개 사료들은 하나의 직선으로 정리되며 앞서 퍼포먼스의 동선이 되었던 붉은 선, 직선에 대한 감각과 강도를 연상시킨다. 완벽하게 정리될 수 없는 기다란 직선을 따라 아기는 다시 한 번 이동되어지고 이동에 의해 기다란 직선은 불규칙적으로 흐트러진다. 이때 아기의 이목구비는 짐꾼에 의해 미세하게 변형되어져 인상이 바뀌는데, 1부 영상에서 아기의 얼굴이 무해해 보이면서도 기이하게 단단한 인상을 주었다면 퍼포먼스에서 아기의 얼굴은 섬짓함과 함께 시원적인 어떠한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훔친 개 훔친 아기 Stolen baby, Stolen dog>에서 개와 아기를 둘러싼 관계들은 사회라는 보호막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몸 혹은 떨어져 나오기를 자처하는 몸들을 지시한다. 이족 보행이 아닌 몸, 인간성을 가지기 이전의 몸과 외부 환경과의 관계들을 다뤄낸다. 사회와 야생성 사이의 감각적 차이와 강도, 질감, 물리적인 대비를 드러내기도 하며 이러한 몸들이 움직여지거나 의존하는 방식, 보호되는 방식, 위치하는 방식의 구조들을 다뤄낸다. 체계화할 수 없지만 본능적 차원에서 인식 가능한 이러한 구조들은 작가의 의도적 선택들이 발생시키는 충돌과 은유를 통해 실체를 가지게 된다. 실체를 가진 이들의 몸은 마치 잘못 자라난 물질의 강인함 또는 생소함을 떠올리게 하기도 하지만 단단하게 응축된 본능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지하에서 위를 바라보던 아기의 얼굴이 낯설지 않아 섬짓했던 순간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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